프리마 돌 앵콜
03-06 겨울의 불꽃 (6)

 길고 조용한 밤이 지나고, 늦은 아침이 온다.
 눈은 아직 내리는 채. 밝아오는 하늘에서 벗겨져 떨어지듯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었다.


 조금 늦잠을 잔 것을 걱정하며 하이자쿠라가 침실로 온다.


 쌓인 눈에 빛이 반사되는 실내는 어딘가 쓸쓸한 인상이다.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실내는 썰렁해서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 침대는 텅 빈 채, 남겨 둔 걸로 보이는 메모가 한 장 놓여 있었다. 문진 대신 올려둔 물건은 한 닢 실링 동전.
 방 한구석에 밀어둔 휠체어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       *       *

릴리아 「이영…… 차……」

 눈에 바퀴가 묻히면서, 릴리아는 휠체어를 민다.
 몹시 추운 아침이었다. 장갑을 끼고 있어도 손잡이를 쥔 손이 얼어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어떻게든 비탈길을 오르자 멀리 총주교회가 보였다.
 흘끗 이별이 애석한 듯 돌아본다.
 전망대 위에선 주택가 지붕이 펼쳐져 있는 광경이 보인다. 새하얀 눈을 얹은 풍경이 마치 침대가 늘어선 모양이다.

릴리아 「미안해, 하이자쿠라」

 짧은 감사가 담긴 편지만을 남기고 릴리아는 하이자쿠라 곁을 떠났다.
 더 이상 신세 질 수 없다. 그녀의 마스터도 이제 곧 돌아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괜한 탐색을 당하겠지. 무엇보다 그 남자와 접촉해 버렸다.
 코트 주머니를 살피고 구깃구깃 주름진 명함을 꺼낸다. 사실 릴리아는 망설이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아직 되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분명 하이자쿠라와 만나버린 탓이다. 덜렁이에 순진하고…… 순수한 미소를 지닌 인형. 좀 더 빨리 그녀와 같은 존재를 만났다면, 어쩌면 결단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고 극단으로 돌아가면 되는가. 아니, 애초에 돌아갈 장소가 있는 걸까……?

남자 「아가씨, 오늘 아침은 쌀쌀하군」

 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남자 「어젯밤에는 잘 쉬었나?」

 모자를 기울이며 인사한다. 두꺼운 코트로 뒤덮은, 큰 몸. 오늘은 목덜미에 세련된 무늬가 그려진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남자 「그렇게 긴장하지 말고. 거래하도록 할까?」
릴리아 「그, 나……」
남자 「어이쿠, 이제 와서 겁이 난다고 하진 마」

 가만히 얼굴을 들여다본다. 화장품 분 같은 냄새가 났다.

남자 「이쪽도 장사다」

 위협을 담아 소리친다.
 릴리아는 이제 되돌릴 수 없다고, 다시 뼈저리게 깨달았다.

남자 「이게 약속한 인형이겠지?」
릴리아 「응…… 그래」
남자 「덕분에 도움이 됐어. 전쟁이 계속되는 바람에 인형을 조금도 구하지 못해서 말이야. 극장에서 일하고 있었다면 분명 괜찮은 값이 붙겠지」
릴리아 「그, 돈은……」
남자 「그렇게 서두르지 말라고. 물건을 확인하고 나서다……」

 조잡한 손짓으로 인형에 두른 스톨을 쥐어뜯는다.
 말끄러미 그 단정한 얼굴을 들여다본다.

남자 「……응?」
릴리아 「뭐, 뭐야……?」
남자 「어이 이 녀석이 아니라고」
릴리아 「다르지 않아. 레발자크 소녀 가극단의 가창 인형이야」
남자 「어제 네 옆에 인형이 있었잖아. 동방제 것 말이야. 그 녀석은 어떻게 했지?」
릴리아 「기다려……! 그 아이는 아니야」
남자 「아니기는 무슨, 그 인형이라면 터무니없는 가격이 붙어. 빨리 가져와」
릴리아 「착각하지 마, 그 아이는 내가 데려온 인형이 아니야」
남자 「핫, 우연히 인형과 친구라도 됐단 말인가?」

 남자는 깔보는 듯이 웃는다. 전혀 믿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남자 「슬쩍한 건 인형 한 체만이 아니겠지? 아니면 다른 구매자가 있나?」
릴리아 「착각이야. 내가 팔고 싶다는 것은 이 인형이야」
남자 「이 녀석으론 성립이 안 돼」
릴리아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해 줄래?」

 너무 물러나지 않는 모습에, 화가 치민 릴리아는 그렇게 말을 꺼낸다.
 금세, 남자의 안색이 바뀌는 것을 알았다.

남자 「아가씨, 내 체면을 구기려는 거야?」
릴리아 「그렇지 않아,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말했을 뿐……」
남자 「좋은 배짱이야」

 내리깐 눈으로 한발 한발 다가온다.

릴리아 「뭐, 뭐야…… 큰 소리 낼 거야」
남자 「마음대로 해, 네 편이 있다면 말이지…… 로벨리아인 씨」
릴리아 「………읏!」

 야유하는 그 말에, 릴리아는 이를 갈았다.
 들켰다. 이 머리 색 때문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계산하고 접근했을지도 모른다.

남자 「눈 감아준 덕분에 이 나라에서 있을 수 있었다는 사실, 잊지 마. 허락 없이 머무는 로벨리아인은…… 수용소 행이야」

 그 말에, 릴리아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남자 「……동방제 인형은 어디에 있지?」

 툭 남자가 어깨에 손을 두드리자, 릴리아는 우스울 정도로 몸을 떨었다.

릴리아 「그, 그건……」

 순간, 그 주택이 뇌리를 스친다. 빨간 칠을 한 벽. 따뜻한 난로. 온화한 웃는 얼굴…….

릴리아 「……말할 수 없어」

 쥐어짜듯이 말한다.
 조금도 덥지 않지만, 땀이 뺨을 타고 흘렀다.

남자 「호오……」

 어깨에 놓인 손에 꽉 힘이 들어간다. 마치 곰 곁에 있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목소리가 울린다.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밝고 아무 걱정 없는 목소리가.

 「하이자쿠라……」

 등 뒤 연돌에서 수증기가 길게 뻗어가고 있었다.
 거기서 웃는 얼굴로 마주하고 있던 것은 틀림없이 하이자쿠라였다.


 「어……」

 살짝 내밀어 준다.
 그것은 한 닢 동전이었다. 메모를 남겼을 때 문진 대신 올려둔……

 「어째서……」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하이자쿠라는 껑충하고 뛰어올라 폐를 끼쳐 송구한 모습으로 머리를 숙인다.

남자 「아니, 사과할 필요 없어. 수고를 덜었어」

 어깨를 누르던 무게는 깨달았을 땐 사라져 있었다.
 남자는 실실 웃음을 지으며 하이자쿠라에게 다가온다.

남자 「같이 가주겠니?」
남자 「그래, 정말 중요한 요건이야. 아가씨의 여행인가 하는 것도 쾌적해지겠지」

 릴리아는 휠체어 손잡이를 쥔 손에 힘껏 힘을 주었다.

 「하이자쿠라!」
 「………읏!」

 한층 힘을 주며 바퀴를 굴린다.
 그대로 남자를 향해서 돌진한다.

 「피해!!!」

 힘이 붙은 휠체어는 그대로 남자의 허리뼈 언저리에 부딪쳤다.

남자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인형과 함께, 그것이 어느 정도의 무게인가 남자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황급히 제지하라고 했지만 그것이 역효과였다. 예상 밖의 무게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대로 함께 비탈길을 굴러떨어진다.

 「하이자쿠라, 달아나자!」

 그 작은 손을 잡는다.
 릴리아는 정신없이 달려나가고 있었다.



집필 : 오카노 토야
삽화 : 마로야카
CV : 와키 아즈미 (하이자쿠라)
한국어 번역 : 레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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